8년 전, 대학교 복도에 붙어 있던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 동아리 모집 글을 보고 처음으로 '배리어프리'라는 단어를 검색했습니다. 고등학교도 이과, 대학교도 컴퓨터공학 전공으로 사회 문제와 동떨어져 지냈던 제게 "청각장애인은 자막이 없어 영화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다가왔습니다. 혼자 영화를 보러 자주 갔고, 텅 빈 영화관에서 영화 보는 걸 즐겨했습니다. 저한테는 가장 쉬운 선택이었는데, 이 선택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동아리에는 '스펙을 쌓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활동으로 '배리어프리 인식 개선 캠페인'을 하고 있었는데 오프라인 활동이 반복될수록 되려 자막을 빠르게 많이 만들 수 있도록 웹페이지나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해결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자막을 만드는 것보다 공급하는 과정이 더 오래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2차 저작물인 자막 권리는 어디에도 정의된 적이 없었고, 영화 권리는 상영권·배급권 등으로 파편화되어 한 편을 위해 3~4개 회사와 협의해야만 했습니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고 상황만 모면하려는 선택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막 제작을 기업 사회공헌 형태로 전환하고, 온라인 상영회를 통해 상영료를 지급하는 구조를 만들어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했습니다. 단순 봉사에 불과했던 자막 제작에 왓챠, 딜리버리히어로 같은 사기업들과 연결 지점이 생겼고, 사회적기업가육성사업에 선발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확산시키고자 배리어프리 자막 제작 웹/앱 시스템을 PM으로 직접 개발했습니다. 활동을 하며 제 주변 사람들도 조금씩 변해가는 것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비효율적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효용이 있었고, 제가 생각했던 '효율'의 개념을 새로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창업도 스펙이지, 좋은 경력이 되겠지'라며 시작했던 제가, 문제를 헤쳐 나가는 쾌감을 맛보며 이 활동을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설득하기도 전에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공연 현장의 관계자들이었습니다. 공연 산업은 3개월마다 스태프, 배우, 공연장이 통째로 바뀝니다. 이처럼 짧은 주기 속에서 관계자들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기존 방식만 고수하려 했고, 새로운 시도는 곧 부담이자 거부의 대상이었습니다. 처음 유니스텝 서비스를 시연하러 갔을 때도 관계자들은 안 되는 이유부터 찾았습니다. "의자에 스크래치가 난다"는 우려에는 거치대에 실리콘을 덧대었고, "휴대폰 불빛이 방해된다"는 지적에는 앱 배경에 암전 모드 기능을 추가하며 현장 요구를 반영했습니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자 2년 뒤 현장이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다음 공연엔 자막 제공 안 하냐"고 먼저 물어봐 주기도 하고, 자막 도입을 먼저 제안해 오는 공연사들도 생겨났습니다. 두 번째로, 현장에서 만난 관객들이었습니다. 해외와 달리 한국의 뮤지컬 관극 분위기는 관람객이 작은 움직임조차 조심해야 할 정도로 엄격합니다. 서비스 초기엔 현장 관계자들의 우려가 이해되기도 했고, 서비스를 무사히 안착시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상 유니스텝 현장에 나가보면 우려와 달리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습니다. 먼저 다가와 어떤 서비스인지 관심을 갖고 물어보는 관객이 있었고, 이미 알아보고 반가워하며 응원의 한마디를 건네주는 관객들도 종종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서비스에 공감하고 지지해 주는 관객과 관계자가 훨씬 더 많아졌음을 느낍니다. 공연장 한쪽에 유니스텝 서비스가 설치되어 작동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가 만든 변화가 현장에 확실히 뿌리내렸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어려움은 부족한 리소스 속에서 사업을 ‘지속가능한 구조’로 만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3명의 팀원이 홍보, 마케팅, 티켓 판매 등을 동시에 소화하다 보니 쏟아지는 업무로 과부하가 걸리기 일쑤였습니다. 이대로는 지속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자 자동화를 도입하며 시스템을 하나씩 바꾸어 나갔습니다. n8n 같은 툴을 활용해 관객 안내 메일 발송처럼 반복되던 업무를 자동으로 처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수작업으로 처리하던 부담이 줄어들면서 전체적인 일의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었습니다. 초기 배리어프리 자막 시스템을 개발할 당시부터, '어떻게 만들어야 지속가능한가'를 사업 형태와 연결해 깊이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고민은 유니스텝 개발 시 확장성을 고려한 설계로 이어졌고, 추후 제휴 공연장과 관객이 늘어났을 때도 안정적인 서비스 제공이 가능한 단단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재는 2년간 쌓은 운영 노하우를 ERP 기반으로 표준화하며, 특정 개인의 수작업에 의존하지 않는 시스템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분명히 공연 산업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공연 실시간 다국어 자막 서비스 '유니스텝'은 2년 차에 접어들며 30편이 넘는 공연을 진행했고, 그 안에서 다양한 제작사와 공연장을 만났습니다. 2년 전만 해도 "자막은 안 필요하다"며 시스템 도입에 보수적이었던 제작사들이 이제는 먼저 "다음 공연에도 자막을 넣어달라"며 연락을 보내옵니다. 변화가 충분히 쌓인 사회의 모습을 한 장면으로 떠올려 본다면, "저번 무대는 정말 멋졌는데, 이번 건 좀 아쉽네"라는 감상과 비평이 다양한 언어로 오가는 공연장의 풍경입니다. 지금은 '볼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기본적인 접근이 먼저지만, 접근이 당연해지면 비로소 관객들에게 '취향'이 생겨날 것입니다. 좋아하는 배우가 생기고, 비교할 작품이 쌓이며, 자기만의 감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객 각자의 취향과 담론이 당연해질 때, 비로소 '배리어프리'라는 단어 자체가 필요 없어지는 당연한 일상이 완성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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